2018년 1월 27일 토요일

적그리스도의 최종 그물질에 걸려드는 "불법을 좋아함"의 실체는ㅡ







"멸망의 자식"(적그리스도)의 등장은 하나님의 심판 차원.
그리스도 세상 통치의 천년 기간을 위한 하나님의 숙청/쇄신/청소 작업.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 받도록"(살후 2:12)ㅡ
"이는 그들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으므로 구원
받지 못하게 하심(:10).
진리는 누구나 반기는 바인데 왜 사랑하지를 않을까.
아무 이유 없고 자기 욕심, 자아중심을 버리지 않기 때문.
고로 여기서 진리 사랑은 자기 부인, 십자가 짐
및 모든 것 버림을 말하는 것(눅 14:25,35).

도둑질하던 자도 남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해
선한 직업을 가진다 함과 같이(배운 것이 도둑질뿐이라
번다면 얼마나 번다고ㅡ입에 풀칠하기조차 바쁠 텐데)
삶의 기본이 나를 위함이 아니라 나의 상대를 위하는데 있어.
이것이 머리와 몸의 한 몸 체제에서의 생명(삶)의 법칙.
이런 한 몸 되시려고 주님께서 사람으로 죽음의 고난 받으셨고
바로 이 십자가 지심의 본을 따르는 것이 "십자가 짐".
"매일" 그렇게 하라 하셨으니까, 일상 생활의 기본.

바로 이 생명의 법칙대로 따르지 않는 인간이고
이 세상이므로 하나님의 진노, 저주, 죽음의 파멸만 있어.
모세가 가르친 것이 바로 이 점을 강조함이었던 것.
이런 추악하고 단말마의 비명밖에 나올 수 없는 세상을
아름답게 도색(塗色)하여 마치 사람 사는 곳인 양 
이 세상 神 곧 지배자인 악령은 온 세상을 속여 온 것.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바로 이상 사실에 눈 뜨는 것(행 26:18).
비신자들은 아직도 여기에 사로잡혀 눈을 뜨지 못하고 덤벙거리는 상태.
그리하여 자아중심으로 살고 하나님을 머리로 인식하지 못한
일체의 자기 소행을 뉘우치고 
하나님의 어버이 사랑에 못질만 해 온 것을 가슴 아파하고
다시는 두 번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결심하고 하나님께 약속 드림이 회개.
다시 말해 생명의 법칙을 어기지 않겠다(죄 짓지 않겠다)는
최후 확정적인 다짐이니 
이를 나중에 스스로 어길 때에는
그 응분의 책임을 지겠다는 단단한 각오인 것. 

오늘날까지의 사탄의 속임수는
이런 것 없이 단지 그리스도께서 나 위해 죽으셨으니까
이를 기정 사실로 인정하고 교회 생활에 충실하면
(이를 성경의 "믿음"과 "순종"으로 착각)
영생은 틀림 없다는 것이었으니,
죄 짓는 것은 우리의 육신이 약하므로 불가항력인 줄
하나님께서도 충분히 이해하시니까ㅡ하는 논조였음.
얼마나 사특한 멸망에의 지름길이었던가!

고로 진리 사랑은 바로 이 생명의 법칙 사랑을 말함.
이 법칙을 따라 하나님의 성자(聖子)께서 나 위해 죽어 주시어
자기와 영원히 머리와 몸 관계로 하나가 되게 하셨으니 
망극하고 또 망극할 너무나 크신 은혜.
이와 같이 내가(나도) 목숨바쳐 사랑하는 나의 머리되신
주님(주인님ㅡ주님은 나를 또한 주인처럼 섬기시니ㅡ눅 22:27)께서
명령하시는 모든 말씀을 기꺼이 따르는데
죽으라 하면 죽고 살라 하면 사는 처분대로 하겠다는 것이
회개인데 왜 무슨 토를 달 이유가 있단 말인가.

논리 정연하고 가장 과학적인 행동 지침인 것이다. 
단지 겉으로 시험조로 죽는 모습을 취하는 그 이상의 의미가 없는데
이것을 견디지 못하다니ㅡ가히 사람이라 할 수조차도 없다.
진리는 어린애라도 알아들을 정도로 간명한 것이 특징이다.
복잡하게 말할수록 거짓에 가깝고 그 자신 모른다는 증거다. 
고매하고 감히 쉽게 미치지 못해 알쏭달쏭한 것이 아니다. 
진리가 아닌 거짓으로서 횡설수설이기 때문.

그러므로 남 위한 삶, 상대를 위한 일거수일투족이므로
(그 남이란 것은 나의 주님이시고
나와 함께 한 몸을 이룬 이웃들)
그리고 "울법과 선지자"라 말씀하신 대로(마 7:12)
"남이 내게 해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주는 것"이
생명(삶)의 법칙이므로(세상 사람은 이를 단순히 "역지사지"라 하지만)
내가 만일 진리를 알지 못해 멸망의 낭떠러지 앞에 있다면
이를 알면서도 경고해 주지 않는 이들, 
끌어당겨 주지 않는 이들이 얼마나 얼마나 원망스러울까. 

바로 이 때문에 "네가 경고하지 않으면 
멸망한 자는 자기 죄 때문에 죽지만
그의 피를 네 손에서 찾으리라"(겔 33:8) 하신 것.
바울 사도도 "오늘 너희에게 증언하니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다.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행 20:27)이라 한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님과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히 명령한다"(딤전 5:21) 하였고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덤히 명하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1) 한 것.

말씀 전파는 전도자만이 하는 것이 아님.
구원 자체가 "보내심 받는 것"(요 20:21,22)이므로
그리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하셨으니
머리께서 말씀 전하시고 기도하시는 등의 일체를 
몸(의 지체)으로서 본받아 하는 것. 
이것은 누구나 해야 하는 기본이고
나머지 능력 행함 등은 은사를 따라 하는 것임(고전 12:30).

그러나 유의할 것은 당시의 "방언(외국의 현지 언어 구사)"은
처음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하기 시작하는 때이므로 
외국어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냄이 필요한 때이나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 굳이 이를 고집한다는 것은
무의미하고 악령의 선동에 놀아나는 것이 되므로 
유의할 일이며 아무리 "방언, 방언" 하더라도
위에서 설명한 자기 부인과 십자가 짐, 모든 것을 버림이 없는 한
거짓임이 드러나는 것이니 식별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천사의 방언을 할지라도" 한 것은 천사의 방언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비록 천사의 방언일지라도"ㅡ가정해서 하는 말인데도
악령들은 마치 그런 방언이 있는 것처럼 속이는 것이니
인생들을 희롱하는 정도가 이와 같다. 

가장 이상향적인 삶의 방법으로서의 한 몸 체제에서는
자기 자신 혼자 누릴 수 있는 것은 존재 않고
오직 모든 사람을 섬기는 차원에서 의미가 있을 뿐이니
눈은 눈의 자질, 입은 입의 자질을 자기 혼자 쓴다는 것이 무의미함과 같다.
그대신 내 주변의 모든 이웃은 나를 위하게 존재하는 것임을 
백번 말해도 지칠 리 없고 즐거움을 안겨 줄 수 있는 
아름다운 삶의 비결 그 자체이다.  
이상향은 여기서 비롯되는 것인데 사람들이 눈이 어두워 너무 몰랐던 것.

그러나 이 이상향의 법대로 따르기만 한다고 될 일은 아니니,

① 오늘 살아도 내일 죽으면 그만ㅡ
고로 초자연계 몸으로 복귀함이 최우선.
② 머리가 중심인데 과연 그런 머리가 될 만한 존재가 있느냐ㅡ
아담은 죽었으므로 이것 역시 최대 난관.
③ 이미 엎질러진 물로서의 인간의 죽음이라 
하나님의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에서 
생명의 법칙에서 이를 어기면 죽음뿐이므로
지금까지 자아중심으로 산 결말은 죽음의 파멸뿐이라
이를 반드시 거쳐야 하는데 이렇게 죽으면 그만이니
죄 값을 치르고 난 다음에는 살아나야 하는데 
그 살아나는 방법이 도저히 없어. 

때문에 하나님 친히 어버이 사랑으로 나서시니
곧 사람되시어 우리가 당할 죽음에 동참하심으로써
우리와 하나(한 몸)되신 후에 바로 그 하나됨을 통해
그 죽음을 내 죽음, 그 부활을 내 부활 등으로 삼는
다시 출생하는 것ㅡ성령으로 출생하게 하신 것.
따라서 새로 창조되는 방법으로 유일하게 가능하게 된 것.

죽어 소용 없게 된 첫 사람 아담을 대신하시는대칭 아담이시므로 

처음 오신 것은 우리와 하나되시려고
굳이 이 자연계 육체 즉 죽음의 모습으로 오실 수밖에 없었고
그러나 이것이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시므로
본격적인 그 원래의 영광으로서의 초자연계 몸의 모습으로
반드시 다시 세상에 오셔야 하는 것. 
이렇게 두 번으로 나누어 오시는 절대적 필요성을
적그리스도는 도저히 흉내 낼 수가 없음. 
처음부터 영광의 "그리스도"로 임하는 순서를 취하자니
전무후무한 기적의 초능력으로 나타날 수밖에. 
그리고 온갖 거짓으로 그럴 듯하게 꾸민 
소위 "첨단 지식"(실제는 아니건만)으로
현란하게 속이려 들 수밖에 없으니 유의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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