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30일 화요일

대칭 아담께서 전적으로 나를 위하신다는 확신 아래 자기 부인이 가능해지는 것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으니"(롬 15:2).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들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 10:33)ㅡ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는 것 즉 내가 원하는 대로 하지 않고 상대가 원하는 대로 해 주는 것이 "자기 부인". 

우리는 이 자기 부인으로써 천국 삶의 예행 연습 또는 수련을 하고 있는 연수 기간을 이 세상에서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모두가 평등하게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니, 공산주의, 사회주의 같은 시행착오가 있을 수 없는 가장 완벽한 방법입니다. 이제까지 너무나 자아중심으로 일관해 왔고 그것이 마치 정상인 양 세뇌되어 왔기에 "자기 부인"이 엄중한 경고처럼 우리 귀에 들리고 있을 뿐으로 사실은 이상향적 삶을 제시해 주는 희소식인 것입니다. 

21세기 적그리스도 대응(對應) 신학(神學)은 "희생제물"神學이 아니라 "대칭 아담"神學이어야 (1)
















21세기 적그리스도 대응(對應) 신학(神學)은 "희생제물"神學이 아니라 "대칭 아담"神學이어야 (끝)














2018년 1월 27일 토요일

그리스도의 재림은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신 확증인 것





그리스도께서 다시 세상에 오시는 것은
대칭 아담이신 말 뜻 그대로 사람이시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부활하시어 현재 살아 계시는 사람이신데
죽은 자들이 가 있는 곳에 계실 수는 당연히 없는 것이고
하늘에 계실 수도 없으니 그렇다면 모든 인간이
다 하늘에 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무갈 제국의 아크바르(Akbar)가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해
궁금해하고 그 이유를 알고자 한 것은 
상당히 지적으로 우수한 두뇌(학문은 없다지만)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ㅡ천주교 신부는 답변을 못했습니다.
천주교만 아니라 개신교라도 똑같이 답변에 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만이시라면
다시 말해 성부와 하나되어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라면
우리의 구원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지금까지의 잘못된 인식으로는 
그리스도의 희생 제물의 근거 하나로
우리가 구원되는 것이라고 단순히 생각해 왔지만
전혀 다릅니다. '둘의 하나됨'이 구원의 원리입니다.

그래야 그 죽으심이 나의 죽음,
그의 부활하심이 나의 다시 살아남,
그의 현재 살아 계심이 나의 현재 산 자로서의 위치이기 때문.  
그리고 생명의 법칙이 한 몸 체제에 있어
모든 사람이 똑같이 대칭 아담을 모시고 있어야 하기 때문.
첫 사람 아담의 육체를 모든 인간이 물려받아 있는 것처럼. 
이런 작용은 사람으로서는 절대 불가능하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인 것입니다. 

그리고 둘이 하나됨에서
같은 사람이라야 둘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아니신데 내가 죽은 것으로 하실 수가 없는 것. 
즉 그 죽으심을 내 죽음으로 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런 사실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의 인성, 신성이 아직도 논란의 대상이 되어 있다는 것은
이와 같은 구원의 도리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첫 사람 아담은 그저 낳고 낳기만 하면 되는
아담 즉 머리로서의 역할이지만
(불행히도 범죄로 죽어 파탄이 났지마는)
대칭 아담께서는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는
아담 역할이시므로 그래서 만인간에게 
똑같은 그런 효과를 내야 하는 것이므로
하나님되심 즉 성령으로 각자에게 임하시어
우리 각자가 '육체'라면 그 '영혼'으로 존재하심이
필수, 필연인 것입니다. 


적그리스도를 따르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는 사건이 있으니












비슷한 내용이 둘일 때
앞선 것이 진짜이고
뒤에 오는 것이 거짓 즉 모방이 됩니다.
아무리 화려한 것으로 치장을 해도
빈 깡통의 요란스러움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모방할지는 모르나
상당한 세월의 간격을 두고 
두 번에 나누어 오는 것만은 모방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2천년이란 간격을 두시는 것인데
몸된 교회의 연단과 직결되어 있는 것으로서
또한 단 한 생명이라도 구원하시려 함인데
적그리스도는 일시 속이는 것이 목적이므로
그런 내용까지 모방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적그리스도가 모방할 수 없는 것ㅡ상당 기간의 간격을 두고 두 번에 나누어 오는 것 (재수록)






가장 이상향적인 삶의 방법으로서의 한 몸 체제에서는
자기 자신 혼자 누릴 수 있는 것은 존재 않고
오직 모든 사람을 섬기는 차원에서 의미가 있을 뿐이니
눈은 눈의 자질, 입은 입의 자질을 자기 혼자 쓴다는 것이 무의미함과 같다.
그대신 내 주변의 모든 이웃은 나를 위하게 존재하는 것임을 
백번 말해도 지칠 리 없고 즐거움을 안겨 줄 수 있는 
아름다운 삶의 비결 그 자체이다.  
이상향은 여기서 비롯되는 것인데 사람들이 눈이 어두워 너무 몰랐던 것.

그러나 이 이상향의 법대로 따르기만 한다고 될 일은 아니니,
① 오늘 살아도 내일 죽으면 그만ㅡ
고로 초자연계 몸으로 복귀함이 최우선.
② 머리가 중심인데 과연 그런 머리가 될 만한 존재가 있느냐ㅡ
아담은 죽었으므로 이것 역시 최대 난관.
③ 이미 엎질러진 물로서의 인간의 죽음이라 
하나님의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에서 
생명의 법칙에서 이를 어기면 죽음뿐이므로
지금까지 자아중심으로 산 결말은 죽음의 파멸뿐이라
이를 반드시 거쳐야 하는데 이렇게 죽으면 그만이니
죄 값을 치르고 난 다음에는 살아나야 하는데 
그 살아나는 방법이 도저히 없어. 

때문에 하나님 친히 어버이 사랑으로 나서시니
곧 사람되시어 우리가 당할 죽음에 동참하심으로써
우리와 하나(한 몸)되신 후에 바로 그 하나됨을 통해
그 죽음을 내 죽음, 그 부활을 내 부활 등으로 삼는
다시 출생하는 것ㅡ성령으로 출생하게 하신 것.
따라서 새로 창조되는 방법으로 유일하게 가능하게 된 것.

죽어 소용 없게 된 첫 사람 아담을 대신하시는대칭 아담이시므로 
처음 오신 것은 우리와 하나되시려고
굳이 이 자연계 육체 즉 죽음의 모습으로 오실 수밖에 없었고
그러나 이것이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시므로
본격적인 그 원래의 영광으로서의 초자연계 몸의 모습으로
반드시 다시 세상에 오셔야 하는 것. 
이렇게 두 번으로 나누어 오시는 절대적인 필요성을
적그리스도는 도저히 흉내 낼 수가 없음. 
처음부터 영광의 "그리스도"로 임하는 순서를 취하자니
전무후무한 기적의 초능력으로 나타날 수밖에. 
그리고 온갖 거짓으로 그럴 듯하게 꾸민 
소위 "첨단 지식"(실제는 아니건만)으로
현란하게 속이려 들 수밖에 없으니 유의해야. 

적그리스도의 최종 그물질에 걸려드는 "불법을 좋아함"의 실체는ㅡ







"멸망의 자식"(적그리스도)의 등장은 하나님의 심판 차원.
그리스도 세상 통치의 천년 기간을 위한 하나님의 숙청/쇄신/청소 작업.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 받도록"(살후 2:12)ㅡ
"이는 그들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으므로 구원
받지 못하게 하심(:10).
진리는 누구나 반기는 바인데 왜 사랑하지를 않을까.
아무 이유 없고 자기 욕심, 자아중심을 버리지 않기 때문.
고로 여기서 진리 사랑은 자기 부인, 십자가 짐
및 모든 것 버림을 말하는 것(눅 14:25,35).

도둑질하던 자도 남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해
선한 직업을 가진다 함과 같이(배운 것이 도둑질뿐이라
번다면 얼마나 번다고ㅡ입에 풀칠하기조차 바쁠 텐데)
삶의 기본이 나를 위함이 아니라 나의 상대를 위하는데 있어.
이것이 머리와 몸의 한 몸 체제에서의 생명(삶)의 법칙.
이런 한 몸 되시려고 주님께서 사람으로 죽음의 고난 받으셨고
바로 이 십자가 지심의 본을 따르는 것이 "십자가 짐".
"매일" 그렇게 하라 하셨으니까, 일상 생활의 기본.

바로 이 생명의 법칙대로 따르지 않는 인간이고
이 세상이므로 하나님의 진노, 저주, 죽음의 파멸만 있어.
모세가 가르친 것이 바로 이 점을 강조함이었던 것.
이런 추악하고 단말마의 비명밖에 나올 수 없는 세상을
아름답게 도색(塗色)하여 마치 사람 사는 곳인 양 
이 세상 神 곧 지배자인 악령은 온 세상을 속여 온 것.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바로 이상 사실에 눈 뜨는 것(행 26:18).
비신자들은 아직도 여기에 사로잡혀 눈을 뜨지 못하고 덤벙거리는 상태.
그리하여 자아중심으로 살고 하나님을 머리로 인식하지 못한
일체의 자기 소행을 뉘우치고 
하나님의 어버이 사랑에 못질만 해 온 것을 가슴 아파하고
다시는 두 번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결심하고 하나님께 약속 드림이 회개.
다시 말해 생명의 법칙을 어기지 않겠다(죄 짓지 않겠다)는
최후 확정적인 다짐이니 
이를 나중에 스스로 어길 때에는
그 응분의 책임을 지겠다는 단단한 각오인 것. 

오늘날까지의 사탄의 속임수는
이런 것 없이 단지 그리스도께서 나 위해 죽으셨으니까
이를 기정 사실로 인정하고 교회 생활에 충실하면
(이를 성경의 "믿음"과 "순종"으로 착각)
영생은 틀림 없다는 것이었으니,
죄 짓는 것은 우리의 육신이 약하므로 불가항력인 줄
하나님께서도 충분히 이해하시니까ㅡ하는 논조였음.
얼마나 사특한 멸망에의 지름길이었던가!

고로 진리 사랑은 바로 이 생명의 법칙 사랑을 말함.
이 법칙을 따라 하나님의 성자(聖子)께서 나 위해 죽어 주시어
자기와 영원히 머리와 몸 관계로 하나가 되게 하셨으니 
망극하고 또 망극할 너무나 크신 은혜.
이와 같이 내가(나도) 목숨바쳐 사랑하는 나의 머리되신
주님(주인님ㅡ주님은 나를 또한 주인처럼 섬기시니ㅡ눅 22:27)께서
명령하시는 모든 말씀을 기꺼이 따르는데
죽으라 하면 죽고 살라 하면 사는 처분대로 하겠다는 것이
회개인데 왜 무슨 토를 달 이유가 있단 말인가.

논리 정연하고 가장 과학적인 행동 지침인 것이다. 
단지 겉으로 시험조로 죽는 모습을 취하는 그 이상의 의미가 없는데
이것을 견디지 못하다니ㅡ가히 사람이라 할 수조차도 없다.
진리는 어린애라도 알아들을 정도로 간명한 것이 특징이다.
복잡하게 말할수록 거짓에 가깝고 그 자신 모른다는 증거다. 
고매하고 감히 쉽게 미치지 못해 알쏭달쏭한 것이 아니다. 
진리가 아닌 거짓으로서 횡설수설이기 때문.

그러므로 남 위한 삶, 상대를 위한 일거수일투족이므로
(그 남이란 것은 나의 주님이시고
나와 함께 한 몸을 이룬 이웃들)
그리고 "울법과 선지자"라 말씀하신 대로(마 7:12)
"남이 내게 해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주는 것"이
생명(삶)의 법칙이므로(세상 사람은 이를 단순히 "역지사지"라 하지만)
내가 만일 진리를 알지 못해 멸망의 낭떠러지 앞에 있다면
이를 알면서도 경고해 주지 않는 이들, 
끌어당겨 주지 않는 이들이 얼마나 얼마나 원망스러울까. 

바로 이 때문에 "네가 경고하지 않으면 
멸망한 자는 자기 죄 때문에 죽지만
그의 피를 네 손에서 찾으리라"(겔 33:8) 하신 것.
바울 사도도 "오늘 너희에게 증언하니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다.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행 20:27)이라 한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님과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히 명령한다"(딤전 5:21) 하였고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덤히 명하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1) 한 것.

말씀 전파는 전도자만이 하는 것이 아님.
구원 자체가 "보내심 받는 것"(요 20:21,22)이므로
그리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하셨으니
머리께서 말씀 전하시고 기도하시는 등의 일체를 
몸(의 지체)으로서 본받아 하는 것. 
이것은 누구나 해야 하는 기본이고
나머지 능력 행함 등은 은사를 따라 하는 것임(고전 12:30).

그러나 유의할 것은 당시의 "방언(외국의 현지 언어 구사)"은
처음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하기 시작하는 때이므로 
외국어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냄이 필요한 때이나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 굳이 이를 고집한다는 것은
무의미하고 악령의 선동에 놀아나는 것이 되므로 
유의할 일이며 아무리 "방언, 방언" 하더라도
위에서 설명한 자기 부인과 십자가 짐, 모든 것을 버림이 없는 한
거짓임이 드러나는 것이니 식별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천사의 방언을 할지라도" 한 것은 천사의 방언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비록 천사의 방언일지라도"ㅡ가정해서 하는 말인데도
악령들은 마치 그런 방언이 있는 것처럼 속이는 것이니
인생들을 희롱하는 정도가 이와 같다. 

가장 이상향적인 삶의 방법으로서의 한 몸 체제에서는
자기 자신 혼자 누릴 수 있는 것은 존재 않고
오직 모든 사람을 섬기는 차원에서 의미가 있을 뿐이니
눈은 눈의 자질, 입은 입의 자질을 자기 혼자 쓴다는 것이 무의미함과 같다.
그대신 내 주변의 모든 이웃은 나를 위하게 존재하는 것임을 
백번 말해도 지칠 리 없고 즐거움을 안겨 줄 수 있는 
아름다운 삶의 비결 그 자체이다.  
이상향은 여기서 비롯되는 것인데 사람들이 눈이 어두워 너무 몰랐던 것.

그러나 이 이상향의 법대로 따르기만 한다고 될 일은 아니니,

① 오늘 살아도 내일 죽으면 그만ㅡ
고로 초자연계 몸으로 복귀함이 최우선.
② 머리가 중심인데 과연 그런 머리가 될 만한 존재가 있느냐ㅡ
아담은 죽었으므로 이것 역시 최대 난관.
③ 이미 엎질러진 물로서의 인간의 죽음이라 
하나님의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에서 
생명의 법칙에서 이를 어기면 죽음뿐이므로
지금까지 자아중심으로 산 결말은 죽음의 파멸뿐이라
이를 반드시 거쳐야 하는데 이렇게 죽으면 그만이니
죄 값을 치르고 난 다음에는 살아나야 하는데 
그 살아나는 방법이 도저히 없어. 

때문에 하나님 친히 어버이 사랑으로 나서시니
곧 사람되시어 우리가 당할 죽음에 동참하심으로써
우리와 하나(한 몸)되신 후에 바로 그 하나됨을 통해
그 죽음을 내 죽음, 그 부활을 내 부활 등으로 삼는
다시 출생하는 것ㅡ성령으로 출생하게 하신 것.
따라서 새로 창조되는 방법으로 유일하게 가능하게 된 것.

죽어 소용 없게 된 첫 사람 아담을 대신하시는대칭 아담이시므로 

처음 오신 것은 우리와 하나되시려고
굳이 이 자연계 육체 즉 죽음의 모습으로 오실 수밖에 없었고
그러나 이것이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시므로
본격적인 그 원래의 영광으로서의 초자연계 몸의 모습으로
반드시 다시 세상에 오셔야 하는 것. 
이렇게 두 번으로 나누어 오시는 절대적 필요성을
적그리스도는 도저히 흉내 낼 수가 없음. 
처음부터 영광의 "그리스도"로 임하는 순서를 취하자니
전무후무한 기적의 초능력으로 나타날 수밖에. 
그리고 온갖 거짓으로 그럴 듯하게 꾸민 
소위 "첨단 지식"(실제는 아니건만)으로
현란하게 속이려 들 수밖에 없으니 유의해야. 




2018년 1월 26일 금요일

적그리스도 식별법의 하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번개가 동에서 번쩍
하여 서쪽까지 비침 같이(마 24:27) 다시 말해
이 자연계 육체가 아닌 초자연계 몸으로 오실
것인즉, 아무리 기적 아니라 천하의 초기적을
나타내더라도, 아무리 비단 같은 말을 하고 
초지식을 나타내더라도 자연계 몸으로 설쳐댄다면 
그것은 반드시 가짜라는 것임을 스스로 폭로함인즉
이를 명심하라는 경고이십니다. 왜냐 하면 
연계 몸으로는 이미 십자가 지시는 죄인의 모
습으로 오셨으니까 남은 것은 아담의 원래의
초자연계 모습뿐이신 것. 이것이 적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분별법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그 날들을 감하신다" 하심은, 앞 뒤로
하신 말씀 중에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
있다"는 말이 나돈다 하셨으므로, "환난"도
환난이지만, "택한 자라도 가능하면 미혹할"
정도로 그 속임수가 대단할 것임을 미리 말씀하신 
것이니 즉 이미 오래 전에 20새기 말쯤에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수 있었으나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들을 충분히 준비시키시기 위해 멸망
자식 출현의 때를 좀 더 뒤로 물리셨다는 뜻
아닐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대단할" 
것인즉 미리 대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으로 전개되어 나갈 세상의 구도에 대해 참고할 점








의문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이미 모든 사람이 구원 받을 만한 이들은
다 구원 받았는데 천년 통치 시대에
또 구원 받을 사람이 있는지 여부이다.
이것은 베드로 사도가 말한 바
홍수 이전 시대의 사람들을 위해
복음이 전해졌다는 점을 참작하여
그런 차원에서 이해해도 무난할 듯.
그들의 구원(일부에 한하지만)
우리와는 아주 다른 양샹이니까.
위 도식과 같이 시대도 닮은꼴이므로.

고로 성경이 과감히 생략할 것은 생략하여
"몰라도 된다"고 선언한 부분은
그대로 순응함이 좋은 것이다. 
억지로 알려고 하여 섣불리 속단은 금물.
우리로서는 우리의 현재 처지만 해도 벅차다. 
더 이상 신경 쓸 이유가 없다. 
죽은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것은
기정 사실이니까ㅡ거기 일임해도 좋을 듯. 
정 무엇하면 천년 왕국을 부정해도 좋다.





2018년 1월 24일 수요일

눈물로써 신학생들을 가르친 신학교 교수





이름은 기억나지 않으나
언젠가 한국 기독교 역사 강론에서 들으니,
장로교 신학교 교수 중에 한 목사님이 계셨는데
신학생들이 장기, 바둑 두는 것을 보면
눈물을 흘리면서 꾸짖었다고 합니다. 
이 목사님은 항상 그 강조하는 설교가
자기 부인이었다고 합니다.
오늘날 이런 교역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바울처럼 눈물로써 그 양 떼들을 치는 목자가 오늘날 쌀의 겨만큼도 없느냐
















성령으로 계시는 사람(유일무이의 머리로서의 독보성/獨步性)
그리스도께서 유일하게 지도자, 선생이시고
우리는 모두 평준화된 "형제"들일 뿐입니다.
우리들 사이에서는 "선생", "지도자"가 존재 불가능이니(마 23:8)
성령의 계시로 성경을 통해 직접 배우기를 힘쓰고
사람들의 가르침과 성경 교훈을 분별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종속되는 것은 자멸행위이고
주님의 이상 가르치심에 위배되기까지 하는 것이니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고유의 자주 독립성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결과가 되지 않도록 
극력 유의해야 하며 이렇지 못할 때
래밍(lemmingㅡ집단 자살 들쥐)이 됩니다. 
지금까지 이런 무서운 래밍현상이 빚어져 온 것입니다. 

목자(牧者, pastor)로서의 위치
세상 종교의 사제직처럼 특별한 지위가 아니고
오직 많은 형제 중 삶에서의 본보기가 되어
(벧전 5:3/딤전 1:16/4:12/)
형제들이 기꺼이 따를 수 있을 때 한합니다.
그러므로 그 행위를 본받을 수 없는 경우
사이비임을 스스로 입증함이니
각별한 경계를 요합니다. 
"장로(감독)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여기라" 함도
이런 차원에서 주는 격려인 것입니다. 

고로 구원받았다고 자처하여
교회에만 나가는 것으로써 
그 믿음 유지된다는 착각을 완전히 버리시고,
1년 365일 하루 24시간
"마지막 아담(대칭 아담)ㅡ고전 15:45"과 
가장 가까운 영혼과 육체 관계로서
그리고 머리와 몸의 관계로서 
아내 남편, 부모 자식보다 더 가까운 관계로서
겹(複)사람ㅡ이중 구조의 새 피조물로서의
하나님의 아들들로서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본무/本務임을 알야야 합니다. 










2018년 1월 22일 월요일

6일 창조 이전의 "스랍(Seraph)"과 "그룹(Cherub)"의 창조




6,000년이란 성경의 날 수 계산도 아담이 자연계 존재가 되면서 다시 말해 에덴낙원에서 추방되어 악령 사탄의 지배하에 들어가면서부터 세기 시작한 해의 수(年數)다. 그렇게 해서 아담이 천년 가까이 지상에 생존했는데 거기다가 5,000년을 보탠 것이다. 아담으로써 비롯된 인간의 역사일 뿐이다. 이 연수/年數도 6일 창조 중 제4일째 되는 날(비로소 4계절과 1년 365일이 정해져)에서부터 사용된 것이고 그 이전에는 현재 우리의 날 수 계산이 아닌 별개의 것이었으니, "창조의 날" 수 산법/算法이라 할까ㅡ이 두 가지 "날" 개념은 전연 다르니 이 두 가지를 혼동할 이유가 없다.

사실상 지금도 그 창조의 날 시간 단위대로 세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날이 우리가 아는 날로는 얼마가 되는 것인지는 성경이 설명하지 않은 다음에야 알 수도 없지만 알 필요도 없다. 성경이 말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럴 필요가 없다는 충분한 증거다. 그렇다면 안식일의 제7일은 무엇인가. "6일간 일하시고 7일에 쉬셨기 때문에 안식일을 지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사람을 위해 안식일이 있는 것이지 안식일 위해 사람이 있지 않다" 하신 말씀을 반드시 되새길 일이다.


다시 말해 그 날짜가 중요해서 즉 "6일간" 또는 "제7일"째 자체를 신성시해서 지키라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친다"는 그리스도 오시기까지의 예비 교육을 위해 임시 방편으로 정한 것이라는 데에 모세 율법의 모든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7일 1주간 중 하루 또는 수입의 1/10을 십일조로 바치도록 정해졌던 것. 고로 창조의 날 수이건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날 수 계산이건 "날"이라는 개념에서는 공통이니까, 그리고 안식일로 정해진 목적이 하나님의 날이든 그 무엇이든 하나님께 속한 것은 하나님께 바친다는 이 점이 강조되기 때문에 실제의 창조의 날 개념을 우리가 아는 날의 개념으로 얼마든 바꿔서 원용(援用)하여 활용할 수 있는 일이다. 

이것은 필자 개인의 생각이지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의 아름다운 모습의 아담 창조도 유인원 종류를 그 앞서 여러 종류로 지으셔서 어떻게 적응하는지를 충분히 살펴 보신 다음의 결과가 아니었을까. 이 6일 창조의 하루에 해당하는 기간이 우리가 아는 대로의 세월로는 어느 정도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으니까. 모세 당시에도 드러났듯이 하나님의 일에 천사들을 부리시는 것처럼 당시 창조에서 그룹(Cherub)과 스랍(Seraph)들을 동원하셨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6일 창조 전 스랍과 그룹 등 당시 생물들을 만드실 때에만은 친히 손을 쓰신 것이야 물론이지만. 6일 전 창조도 6일 창조처럼 먼저 만드신 자연계 생물(매머드 등 거대 동물과 식물들) 창조의 패턴을 따라 초자연계 존재들(스랍 등)을 만드셨을 것이다.  

인간에 가까운 이런 실험용 유인원들은 제약된 환경 가운데 신속한 멸종이 되도록 조처하셨을 수도 있는 것이니 인간에 버금가는 생물(물론 영혼은 없어도 그 형태만으로도)이 잔존해보아야 좋은 일은 없기 때문.  천사든 인간이든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함으로써 <하나님 친히 하시는> 일이 되도록 짜여진 체제에서는(몸의 각 지체가 하는 일이 머리의 지시를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듯), 6일 창조도 스랍과 그룹 등을 통한 잔 손질이 이루어졌으리라는 추단이 가능한 것이다.  

말씀하시니 그 말씀 하나로 모든 기운(에너지)이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하여 그 말씀대로 되도록 연동'連動된 것으로 보는 것이나, 스랍과 그룹들이 그 명령 일하에 움직여 그대로 되도록 어마어마한 초능력을 발휘하여 이루어놓은 것으로 보는 것이나 의미는 같은 것이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고 처음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창조하신 것들을 활용하신다고 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폄훼되시는 것은 없다.




"물이 있으라 하시니, 물이 있었다" ㅡ (재수록)





성경이 거짓말로 꾸며낸 것이라면 반드시 땅은 "땅이 있으라 하시니 땅이 생겨났다", 물은 "물이 있으라 하시니 생겨났다" 등으로 미주알고주알 말을 만들어 놓게 되어 있다. 이왕 거짓말인데 못지어낼 까닭이 없다. 그러나 성경이 이 물과 땅에 대해 마치 처음부터 물이 있었던 듯이 땅이 오래 전부터 존재하고 있는 양으로 일절 침묵하고 위에 말한 그런 식으로는 일언반구도 없다. 이런 것이 바로 성경의 진실성의 자체 증명인 것이다. 성경이 지어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신 것을 웅변하는 것이다. 



2018년 1월 21일 일요일

진리는 하나일 뿐, 영적인 진리와 자연과학 진리가 따로 있지 않다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과 과학은 분리시켜 논해야지, 신앙이 과학이 되거나 과학이 신앙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지금까지 교회 내의 정설로 되어 있다"고 말한다. "지구의 나이가 6000년이라고 하는 것은 신앙과 과학을 혼동하는 것"이라는 말도 한다. 지구의 나이가 6천년이라는 말을 성경이 한 적이 없다. 모두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것을 가지고 함부로 이렇다 저렇다 단정하려 든다.

오히려 성경은 과학 서책이기를 거부한다. 왜냐면 오직 주제가 인간 구원이므로 이에 불필요한 것은 과감히 생략해 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독자의 주의가 산만해지는 것을 극력 경계하기에 그렇다. 창세기 기록에서 물이 창조된 경로를 말하지 않는 것도 그 한 예다. 땅이 생성된 사실에 대한 것마저도 그렇다. 단지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적시하니까 자연히 과학적 사실이 되는 것뿐이니,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이다. 과학적 사실을 단지 말하는 것과 그것을 설명하는 것과는 다르다. 다르지만 둘 다 과학을 말하는 점에서는 공통이다.


성경이 거짓말로 꾸며낸 것이라면 반드시 땅은 "땅이 있으라 하시니 땅이 생겨났다", 물은 "물이 있으라 하시니 생겨났다" 등으로 미주알고주알 말을 만들어 놓게 되어 있다. 이왕 거짓말인데 못지어낼 까닭이 없다. 그러나 성경이 이 물과 땅에 대해 마치 처음부터 물이 있었던 듯이 땅이 오래 전부터 존재하고 있는 양으로 일절 침묵하고 위에 말한 그런 식으로는 일언반구도 없다. 이런 것이 바로 성경의 진실성의 자체 증명인 것이다. 성경이 지어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신 것을 웅변하는 것이다. 

과학적 사실과 성경의 진실의 기록이 상충된다면 그러면 과학적 관점에서 볼 때 성경이 거짓말하는 것밖에 더 되겠는가. 아니면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거나ㅡ. 하나님의 말씀이 무식함에서 나오는 것인가. 되지도 않는 소리다. 아니라면, 영적인(신앙에 관한) 진리가 따로 있고 과학적 진리가 따로 있다는 말인가. 그런 대칭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리와 대칭되는 것은 오직 거짓뿐이다. 그리고 자연계와 초자연계의 대칭만이 우리에게 유용할 뿐이다.



그러므로 제법 똑똑한 척하며 한다는 소리가 성경(이 "성경"이라는 말도 유치하다 종교적 냄새가 난다 해서 "성서"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으나 성서든 성경이든 말씀대로만 따르기를 힘쓸 일이지 유식한 체하지 말 것이다ㅡ그런 식으로 한다 해서 종교를 탈피하는 것은 아니다)을 오히려 폄훼하는 결과를 만들고 있다. 모르면 아예 입을 닫고 있어야 최소한 자기의 무식이 탄로 나는 것만은 막을 수 있다. 

에덴낙원이 초자연계라는 사실도 소리 소문 없이 밝히고만 있을 뿐 거창하게 초자연계와 자연계의 대칭성을 성경이 처음부터 주장한 적도 없다. 셩경 관련해서 "과학"이라 하는 것은 이제까지 과학계가 자연계 관찰에만 국한될 뿐 입도 뻥긋하지 못한 그래서 이제 양자역학의 등장으로 인해 겨우 눈을 뜰까말까 하는 초자연계를 총망라하여 일컬음을 말하는 것이다. (재수록)

구원을 크게 잘못 알고 있는 것ㅡ협의(狹義)로만 알면 아주 위험한 것




광의의 기본 적인 의미를
성경이 말하고 있으니까
협의에만 매달리고 있는 것이
배도(살후 2:3)의 특징










2018년 1월 20일 토요일

★ ★ ★ ★ 요절 외우기 (1) ★ ★ ★ ★








요절의 장절 기억하기 쉬운 힌트 일별ㅡ
생각나는 대로 이 페이지에 수록해 두겠습니다. 
참고하시면 나름대로의 방법을 찾으실 수 있겠습니다.






★ 롬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름"
10과 10ㅡ로마서

★ 히 6:6과 롬 6:6
(히 6: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으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다
 (롬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
※ 이 두 구절은 상반되는 내용으로서 중요하다ㅡ6:6과 6:6 장절이 같음ㅡ로마서와 히브리서

★ 롬 14:7-9
 (롬 14: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 (롬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것이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
(롬 14: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
14=7x2ㅡ7:14가 아닌 14:7 왜냐면 7~9절로 연달아 나오니까.

★ 고후 5:15
 (고후 5:15)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대신하여"는 오역)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자기를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하심
(고후 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심이니 우리가 생각컨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 5:15ㅡ5가 둘ㅡ고후ㅡ14절은 앞 절로 기억하면 됨

★ 요 3:16과 요일 3:16

★ 롬 11: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될 것이다



(계속)




"마음으로 믿어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름"(롬 10:10)











"과학서"라 함은 과학 전문 서적이란 뜻이야 물론 아니지만
모든 말씀이 진리이므로 진리가 과학이 아니면 무엇인가
(진화론 같은 사이비 과학은 당연히 제외하고)
현대인은 과학이 아니면 진리가 아니라고 믿기에 이르렀기 때문에
성경이 과학서라고 하는 데에 하자가 없다
셩경 관련해서 "과학"이라 하는 것은
이제까지 과학계가 자연계 관찰에만 국한될 뿐
입도 뻥긋하지 못한 
그래서 이제 양자역학의 등장으로 인해
겨우 눈을 뜰까말까 하는 초자연계를
총망라하여 일컬음을 말하는 것이다




2018년 1월 19일 금요일

히 6:6과 롬 6:6의 차이












때문에 그리스도를 밟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일도 가능해지는 것.
내 안의 성령께서는
오직 나와의 사랑의 삶을 위해서만 계시기 때문.
그러나 이 경우 성령을 욕되게 함이므로
영원히 속죄되지 않으니(히 6:6/10:26)
요한도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다고 하는 것(요일 5:16).
"말로 인자를 거역함"(마 12:32)과 전혀 다른 상황. 

롬 6:6은 우리의 자아중심의 온상인 우리 육신이 척결됨이고
히 6:6은 그런 육신이 없는 아담이나 영물들이
범죄하게 되는 자아중심을 스스로 만드는 행위.
자아중심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님.
자기 부인에서 벗어나면 언제든 얼마든 
회귀하게 되는 것이 자아중심.
손바닥을 아래 위고 뒤집기 하는 것과 같음. 

그래서 바울 사도가
"내가 나의 몸을 항상 복종시킨다"고 한 것임.
이 경우 자아중심은 우리의 육체적 욕구를 따라
나타나는 것이므로 그러함. 
고전 7장에서 살면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함"인 것. 
"주님을 어떻게 하면 기쁘시게 해 드릴까"ㅡ.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기" 때문에
"거하든지 떠나든지 (죽든지 살든지)
주님을 기쓰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는>" 것(고후 5:9).





모든 것을 법칙 차원에서 인식하는 것을 과학적 사고방식이라 한다








구차스럽게 이 세상 살고자 하는 욕심에
이 생명의 법칙 어기면 
영원토록 생명에서 단절될 것이니
영락없을 것이니ㅡ
각자 알아서 처신하라는 것이 성경의 추상 같은 명령이다. 
자비를 베풀 자에게는 한 없이 자비하지만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그렇게 무자비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극(極)과 극의 대립이니까. 




언제 말해도 참신하고 즐거움이 되는 생명의 법칙을 다시 설명하면ㅡ





삶의 극대화ㅡ
이것이 생명의 법칙이 아니면 무엇인가.
나라는 개체가 있고 여럿이 함께 사회를 구성하고 있다면 
그 여럿을 나 자신으로 삼는 재주, 기술이 바로 생명의 법칙으로서의
'나와 너가 이루어져 한 몸을 이루는 우리'가 됨이다. 

머리를 중심으로 모두 한 몸 체제가 되면
다시 말해 내가 눈일 때 
나는 나의 눈으로서의 역할을 내 이웃들에게 제공함으로써
그와 똑같은 원리로 입, 코 등이 나를 위하게 되니
나는 비록 일개 눈이지만 머리를 비롯해 전부가 
나 자신으로서 존재함이다. 풍성한 나ㅡ곧 대아(大我).

싸우지 않고 시기하지 않고 다투지 않고
절대적인 화평리에 그 모든 것을 내 소유로 즐기는 것.
내 이웃 또한 같은, 평균된 삶의 행복을 누림이니,  
이것이 자유, 평등이다. 
내 스스로 원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내 이웃을 사랑함이니까.
단 이 이웃은 같은 머리를 함께 공동으로 모신 
지체를 의미함은 당연하다. 

이 지체를 구성하지 못하는 국외자가 들어가는 곳이 불 못. 
생명의 극락(極樂ㅡ극한 환락)의 대칭이니까 필연적으로 
극통(極痛)의 상태일 수밖에 없어 그런 것이다. 
대칭 원리에서 이는 불가피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