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다
이 백성은 실로 풀이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설 것이다' 하라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하라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보상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으며
그는 목자 같이 양무리를 먹이시며
어린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실 것이다
너희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위로 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 40:1-11)
대칭 아담께서 처음 세상에 오실 때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권능으로 와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광야에서 외친 것처럼
오늘날 두 번째로 오실 때
교회를 정화시키기 위해
두 감람나무의 출현이 예고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어느 개인을 지칭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곱 눈, 일곱 영"
즉 성령의 역사(役事)하심을 의미합니다.
오늘 바로 그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위의 "여호와"는
대칭 아담으로 세상에 다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
곧 우리의 주님을 가리킵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뵌 기록이 나오는데(창 18:1)
천사 둘과 함께 사람으로 나타나신 것으로서,
성자/聖子께서 성부/聖父의 "형상"이시므로
말씀을 하시든지 무엇을 하시든지
성부의 이름으로 행하시는 성자이십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요 10:30) 하심과 같습니다.
즉 "여호와"는 그 "하나"로 계시는 성호(聖號)이십니다.
고로 구약 시대의 위엄의 하나님께서는
바로 세상에 오신 성자 하나님이시니
성경을 모르는 신학자들은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별개라는 망발도 서슴지 않으나
하나님의 양면성이시니
"사랑"이심과 동시에 "소멸하는 불"이십니다.
사람이 되신 이후에도 하나님의 이 양면성은 불변이라
계시록은 이를 "어린양의 진노"(계 6:16)로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되어 계시는 오늘날에는
다시는 이 "여호와"라는 칭호를 쓰지 않고
오직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통하는 것도
그 까닭입니다. 따라서 성부께서는 "아버지"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서 통하시게 됩니다.
고로 신약 성경에서 구약을 인용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여호와" 성호를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도 친히 아버지가 되어 계시므로
아버지라 부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요 20:17)
성자께서 사람이 되셨다고 해서
성부를 "여호와"라 하시지 않음과 같은 이치입니다.
세상 비신자에게는 "하나님" 또는
창조주 하나님, 창조주 등으로 충분합니다.
성자께서 형상(형체)이시나
성부께서는 실체이시므로 우리의 영혼과 육체처럼
형체와 실체는 하나이므로 "우리"라고도 표현되십니다.
창세기에도 "우리"(창 1:26)란 표현이 나오고
새 창조에서도 "우리"(요 14:23)라는 표현을 하셨습니다.
따라서 만유 창조에서도 성경은
성부께서 "성자로 말미암아" 창조하셨다눈 표현을 씁니다
(히 1:2).
(행 20:2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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